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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ater] 오펜하이머 - 불처럼 뜨겁게 다 태워버린 이의 이야기

Aubri 2023. 8. 24. 11:58

 

오펜하이머 포스터(사진: 유니버설 픽쳐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오펜하이머>

 

-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실화 바탕이지만..) -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건네준 죄로 30,000년 동안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았다. 어릴 적 그리스 로마 신화를 봤던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신화 속 인물의 이야기다. 종종 인간 세계의 삶의 질과 질서를 바꿀만한 혁명적인 발명이 있었을 때도, '프로메테우스'에 빗대어지곤 한다. 그 때마다 사실 '인간을 위해 대단한 일을 했군'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나조차도 그러했고,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프로메테우스의 삶과 시선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놀란 감독은 우리가 프로메테우스를 이해하게 만든다. 우리가 잘 알지 못 하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바로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창조한 신이라는 것이다(일부 판본에는 다른 신이 창조했다고 나와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창조하고, 사랑하고, 안타까워 하며 돕고 싶어했다. 그리고 여기 한 과학자도 인간을 위해 불기둥을 만들고 그 불기둥에 불타 간을 쪼이는 것 같은 슬픔과 어려움을 겪는다.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J. Robert Oppenheimer)는 미국에서 태어난 천재 물리학자였다. 오펜하이머는 처음엔 과학과 우주를 너무나 동경하고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세계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진리와 원리, 작은 원소들의 생성과 분열, 불확정성의 원리까지. 잠을 이루지 못 할 정도로 그는 이러한 양자역학 연구에 몰두하며, 실제로 큰 성과를 이끌어낸 천재였다.

하지만 그는 오직 '과학에만'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블랙홀에 대한 연구 등 엄청난 물리학적 성과를 내는 저명한 학자가 되고서도 당시 대공황이라는 시대 상황과 맞물려 공산주의 사상에 관심을 보이기도 하고, 언어와 예술에도 깊은 조예를 보였다. 이렇게 세상의 원리 뿐만 아니라 그를 감싼 모든 진리에 대해 그는 궁금해 했고, 사랑했던 것 같다. 결국 그가 핵무기 개발에 착수한 것도, 대의적으로는 독일로부터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핵 무기 개발에 착수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주와 과학에서 사람과 세상으로 그 사랑과 관심이 옮겨간 것처럼 보였다.

 

이 과정이 프로메테우스의 서사와 겹쳐 보였다. 인간의 윤택한 삶을 위해 고기 대신 속임수로 뼈를 신들에게 제물로써 바치게 도운 프로메테우스와, 실제로 그렇게 하여 제우스의 진로를 산 인간들, 그리고 인간들을 위해 빼앗긴 불을 신들에게서 훔쳐 선물한 프로메테우스. 자신이 빌미를 제공했으나 인간이 행한 것에 대한 책임(뭐라고 표현해야할지)으로 불을 가져다 주고 평생 형벌을 받게 되는. 양자 역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이윤 다툼과 맞물린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격돌과 자신의 이론에서 비롯된 핵 무기의 개발, 그리고 그에 따른 인과를 책임지기 위한 원자폭탄 개발을 주도하는 점까지, 프로메테우스의 서사와 같은 삶을 산 오펜하이머가 보였다. 영화를 보고 와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니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왜 어째서 별이 죽고 태어나고 우주가 태어나는 과정을 사랑했던 과학자가 손에 피를 묻히고 쓸쓸히 죽어가야 했는지. 이는 모두 사람과 사회와, 이념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오펜하이머는 인간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바친다.

 

과학적으로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인간의 손으로 해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일을 해내지만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무기를 만들어낸 오펜하이머. 극 중 원자폭탄 실험 장면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5, 4, 3, 2, 1 ... 내파 측정에 실패해버려 2년 간 20억 달러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고, '0에 가까운(near 0)' 세계 종말의 확률이 동반된, 그야 말로 불확정성 그자체인 실험이 결국 이전에 본 적 없던 큰 불기둥과 빛을 가져왔을 때, 아마 모든 관객들은 그 빛을 '아름답다'고 느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눈이 멀 정도로 밝고 처음 보는 그 밝은 빛이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극장 안과, 스크린을 가득채우는 빛과 불기둥, 불확정성 속의 확정을 인간 최초로 발견해낸 그 무궁무진함에 대한 경외감. 이 연출을 이끌어낸 놀란 감독은 정말 천재라고 생각됐다. 더 놀라운 점은, 그렇게 경외감을 심어주는 빛에 경고라도 하듯이 여파로 인해 몇 초 뒤에 울려오는 폭발 진동음 이었다. 마치 "정신 차려라"고 경고하는 듯한 귀 아픈 소리는 곧 사람들의 윤리적 고민과 연결된다.

 

과학적으로는 성공했으나, 도덕적으로는 살인자가 된 당대 최고의 천재들. 그리고 그 천재들을 이끄는 프로메테우스, 오펜하이머.

 

I feel I have blood on my hands.

손에 20만명의 피를 묻힌 오펜하이머는 트루먼에게 더 이상의 피를 묻히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징징이 취급을 당하며 천대당했지만. 인류 최고의 과학적 발명을 하고, 어찌보면 세상의 멸망을 막은 것일 수도 있으나(세계 대전을 종식시킴으로써) 그 때부터 간을 쪼이며 살게 된 오펜하이머였다. 극 중에서 이런 그의 불안한 도덕적 내면 갈등의 모습이 아주 잘 묘사된다. 영화 내내 들리던 기관차의 소리 같던 큰 굉음은 발구름 소리였고, 그에게는 종전을 기뻐하는 동료들의 환호성과 굉음이 종말로 치달아 가는 준비음과 일본인들의 비명소리로 들렸다. 그리고 이 괴로운 소리는 그를 떠나지 않고 평생 따라다니며 그를 쪼아댔다.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 바가다드 기타 (힌두교 원전, 산스크리트어)

 

오펜하이머는 결국 수소폭탄 등의 추가적인 핵무기 생산 및 무분별 사용에 대해 결사적으로 반대했고, 원자폭탄의 아버지라는 이름, 즉 세상의 파괴자가 되어버린 자신을 조금 더 갉아먹으면서도 세상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 결국 그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국가에 버림 받고, 휴양지에서 가족들과 노후를 보내다 후두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 짧은 십수년이 그에게는 30,000년의 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어릴 때 오펜하이머와 하이젠베르크 그 대립, 또 아인슈타인과의 대립 등에 대해 이야기만 들었지 이렇게 영화로 직접 보니 내가 그 세계에 들어간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특히 정말 놀라웠던 것은 처음엔 우리가 정말 과학자들이 열정적으로 학문에 대해 토론하고, 발명하며 희열을 느끼는 과정에 몸 담게 하다가 서서히 그 윤리적인 고뇌에 동조하게 하는 연출을 기가 막히게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소름이 돋았던 부분은 바로 스트라우스의 정체와 그 연출의 의미였다. 영화가 처음 시작될 때부터 계속 들었던 의문점이 있다.

 

어째서 스트라우스의 청문회 과정만 흑백으로 나오는 것이지?

 

 

이런 의문점을 가지고 분석하다가 스트라우스가 자신의 앙심을 드러낼 때, 머리를 탁 쳤다.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를 부정해서 세상을 밝게 볼 수 없거나, 혹은 불을 너무 오남용하여 그 불로 눈이 멀어버린, 그런 어리석은 이들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프로메테우스가 없었다면 이렇게 어두운 세상이 지속되었을 것이라는 걸 표현하는 연출이 아니었을까. 사실 이 부분은 계속해서 고민해보고 있지만 잘 모르겠다. 그리고 자신이 오펜하이머에게 했던 것처럼 똑같이 돌려받는 스트라우스에 대한 연출. 평행으로 두 인물의 서사가 진행되다 비슷한 이야기지만 다른 끝을 맞는 인생. 불로 인해 장님이 되어버린 사람과 결국 헤라클레스에 의해 줄을 끊고 자유가 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오펜하이머의 대조되는 서사가 정말 소름이 돋았다.

 

많은 사람들이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를 알아도 불쌍하다, 대단하다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놀란은 프로메테우스의 입장, 꼭 오펜하이머가 아니더라도 세상을 격변시킬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천재의 입장에서 그 고뇌를 담아냈다. 어떻게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세상을 바라보고, 메세지를 전달할 생각을 했을까. 천재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놀란은 끊임없이 메세지를 던진다. 오펜하이머의 생애를 통해, 폭력에 대응한 폭력은 파멸을 불러올 것이며 지성을 가지고 서로 협력하고 함께 살아가야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았다. 힘의 논리로 세계 정세를 운영하지 말고, 오펜하이머가 그토록 울부 짖었던, 이데올로기의 이분적 대립에 눈이 멀어 인류애를 상실하지 말고 함께 합의하고 평화를 이뤄야 한다는 놀란 감독의 이야기가 들리는 것 같았다. 냉전 처럼 국가적 대립에서도 명심해야겠지만, 우리 일상 속 인간관계 등에서도 이 사실을 꼭 명심해야할 것이다.

 

2023.8.23 시청

2023.8.24 씀

 

Aubri